2016년에 발매되어 막 3주년을 맞은 이민휘의 [빌린 입]은 국내 포크 앨범 중에서 아마 내가 가장 애정을 갖고 들었던 앨범일 것이다.


어쿠스틱/일렉 기타, 베이스, 드럼, 피아노, 바이올린과 첼로 등 현악기, 그 외에도 알토 플루트, 트럼펫, 신시사이저 등이 쓰인 [빌린 입]은 12인치 바이닐과 디지털 음원으로 발매되었다. 인터뷰(1)에 따르면 CD가 아닌 LP를 선택한 것은 청자가 이 29분짜리 앨범을 트랙으로 쪼개서 듣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듣길 바라서였는데, 그것은 [빌린 입]이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앞서 존재했으므로 악기 편성, 화성, 멜로디 등 ‘음악적인 구성’ 또한 무엇보다 그 이야기를 돕기 위해 동원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클릭한 인터뷰에서 이민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앨범은 닫힌 입을 여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작자 본인의 답변임에도, [빌린 입]에 대한 위와 같은 요약을 읽었을 때 느꼈던 저항감을 기억한다. 앨범을 듣고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가? 오히려, 만약 [빌린 입]이 정말 닫힌 입을 여는 이야기라면, 앨범이 <침묵의 빛>으로 끝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이 글은 최초의 알쏭달쏭한 청취 경험에 비추어 이민휘의 말을 다시 이해하기 위한 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번역본을 만들기 위한 글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나는 우선 ‘이야기’에 관해, ‘침묵’에 관해, 또한 ‘침묵의 빛’에 관해 말하려 한다.

1. 그런 이야기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앨범이 있다고 한다면, 여기서 ‘이야기’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이야기가 [빌린 입]에 선행했다는 점, 음악적인 구성과 이야기를 구분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일단 ‘이야기’에 그 원본의 한 변형일 ‘가사’를 대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중요한 것이 오로지 가사였다면, (물론 읽기라는 것은 결코 그렇게 투명한 행위가 아니지만 오류를 무릅쓰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야기와 우리가 수용한 이야기는 서로 그렇게 다르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빌린 입]은 가사가 전부가 아님을 우리는 안다(가사와 가사를 제외한 음악적 요소 사이의 균형에 관해,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HETEROPHONY)’의 정구원 평론가는 「가사로부터 도망치기」에서 가사에 대한 과잉한 반응이 “음악에 존재하는 다른 부분까지 침식해 들어가”는 상황을 염려한 바 있다(2)). 이야기는 음악을 통해 굴절되어 다른 이야기가 되고, 이때 음악과 이야기는 이미 서로의 일부다. 그리고 입력된 이야기와 도출된 이야기를 더는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기에, 우리는 (물론 선행 텍스트와 가사의 존재를 잊을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음악)를 어떻게 들어야(혹은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들리는지’에도 집중해야 한다.


세부 트랙으로도 들어가 보자. 화성과 음정, 약간의 베이스 선율과 리듬으로 <받아쓰기>를 예언하는 <돌팔매>를 지나 <빌린 입>에 진입하면, 알토 플루트의 음색과 조응하여 매개된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어쿠스틱 기타와 이민휘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제 ‘나’가 말하길, ‘그대’의 입(혀)과 귀는 빌린 입과 빌린 귀다(“이제 내가 말할게/그대 입과 귀는 그대 것이/아니었다고”). <거울>의 피아노는 두 발 아닌 걸음걸이를 보여주는 듯하고, 어쩐지 잘 알려진 말장난 하나를 상기시키는 구절(“어머니 거울에 들어갑니다/(저는)”)은 그런 말장난을 닮은 음형으로 나타난다. <거울>에 부분적으로 등장했던 빗소리는 <부은 발>에서 심상의 중심으로 돌아오며 <꿈>은 이민휘의 허밍을 뒤덮는 속삭임들, <깨진 거울>은 들어갔던 거울에서 나와 그것을 깨는 고아침(이민휘의 남편)의 목소리가 주가 된다. <받아쓰기>에서는 아버지와 한 남자가 ‘나’의 도둑맞은 혀를 둘러싸고 대치한 상황을 ‘나’가 “커다란 목소리로” 가르고 남자를 고발하려 하나, 결말을 알지 못한 채 끝난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나’가 혀 없이 빌려 말하던 사람, 그리하여 받아쓰기를 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내 청취 경험에서 [빌린 입]을 지배한다 느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민휘의 ‘흥얼거림’이었다. [빌린 입]에서, 또한 이민휘가 속한 2인조 밴드 ‘무키무키만만수’의 [2012]에서도 그 흥얼거리는 보컬은 목소리의 중첩, 그리고 잦은 도약과 합쳐져 어떤 청각적인 공동을 형성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주요한 요소였다. 이야기가 굴절된 결과 밖으로 새어 나온 이 흥얼거림으로 인해 나는 가사의 내용마저 얼마간 뒤편으로 밀어두게 된다.


그렇다면 흥얼거림은 어떻게 단순한 특징에 머물지 않고 (가사를 밀어두면서까지도) ‘이야기’의 핵심을 건드리게 되는 걸까? 이는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침묵의 빛>과 관계 있다.


2. 닫힌 입을 여는

<받아쓰기>에 이어 흘러나오는 <침묵의 빛>은 피아노와 첼로로만 연주되는 일종의 에필로그다. 먼젓번의 흥얼거림과 함께 우리는 처음의 질문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데, 그것은 닫힌 입을 여는 사람의 이야기가 어째서 <침묵의 빛>으로 끝나게 되느냐다. 만약 <받아쓰기>에서 앨범이 끝났다면, 어쩌면 나는 이민휘의 요약을 처음부터 어느 정도 수긍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침묵의 빛까지 이끌리게 될까? 이 질문은 일단 ‘열린 입’과 ‘침묵’의 직관적인 불일치에서 시작해 ‘닫힌 것을-연다’는 요약의 명쾌함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이에 답하는 다음의 내용은 [빌린 입]이 닫힌 입을 여는 이야기라면(혹은 그런 이야기라 한들) ‘침묵의 빛’까지 가야만 한다는 이민휘의 선택에 대한 개인적인 주석이다.


우선, 이 청취의 마지막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침묵의 빛>에 도달하면, 나는 앨범을 강력하게 감쌌던 흥얼거림에서 놓여나 청자 내부의 노래로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꿈>의 허밍보다 한참 밑에서 울리는 것 같은 첼로는 내가 나의 닫힌 입을 (재)인식하면서 들려오고, 그럼으로써 나는 빌린 입에 대해 노래하던(또한 그 자신도 빌린 입으로, 받아쓰는 방식으로 말했던) 이민휘의 입을 내가 전보다는 덜 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혹은 착각)에 이른다. 이민휘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빌린 입]을 듣는 일에 의해 청자의/다수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다면, 그것은 <침묵의 빛>에 이르러 청자 또한 (침묵으로써) 목소리를 넘겨받는 바로 이런 순간 때문에, 역설이자 증폭적인 경험으로서 가능해지는 것 같다.


역설이자 증폭적인 경험. 바로 그것이 ‘닫힌 입을 여는 사람의 이야기’를 곰곰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콧노래 같은 음성이 멈출 때에야 이민휘의 ‘이야기’가 한 번 순환한다는 것, ‘혀를 되찾는다’는 그 추정상의 결말을 청자도 함께 체험한다는 것, 그런데 그 체험은 청자가 빌렸던 이민휘의 입이 침묵하면서 청자 역시도 침묵할 때 비로소 예비된다는 것, 하지만 유의하길, 그 침묵은 완전한 침묵이 아니라 청자에게 노래를 건네는 침묵이라는 것, 그리하여 결말에 알맞은 잠재적 말하기는 침묵 속에서 가능해진다는 것. 오독의 가능성을 품은 이러한 청자-버전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이민휘의 목소리가 중단되는 지점에서 이민휘의 이야기가 끝나는(즉 ‘입을 여는’) 구도를, 다시 말해 그 이야기 자체를 (이제야) 스스로 성립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결국 ‘닫힌 입을 여는 사람의 이야기’를 (좀 비뚤게)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말의 회복’이라는 서사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어지는 생각은 ‘침묵의 빛’이라는 제목에 대한, 또한 질문에 앞선 첫 청취에서 그 제목이 주었던 이상한 감동에 대한 것이다. “입 나만 여닫을 수 있다는 듯”, “귀 나만 열어둘 수 있다는 듯”이라는 자조 섞인 비소에서 출발한 이가 결국 다시 말하며 끝나는 결말이라면 내게는 좀 위험하거나 지난하게 느껴졌을 테지만, 그 대신 아직 입을 열지 않고도 있을 수 있는 장소에, 빌린 입을 침묵시킨 곳에, 다름 아닌 ‘침묵의 빛’에 ‘나’와 청자가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수용하고 애호할 수 있는 방식의 (일종의) 생존으로 생각되었다. “해소되지 않는 침묵과 발밑의 숫자들”. 그렇다면, 이제 침묵이 해소되지 않는 건 그게 반드시 해소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침묵이 결여, 빈 공간, 무의지가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여기서는 특히 ‘인간과 말’의 본질을 탐구했던 의사/작가 막스 피카르트를 인용하려 한다. 피카르트는 언젠가 ‘말의 빛’에 관해 이야기하며 침묵을 언급한 바 있는데, 그에게 침묵은 말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빛에 대항하는 어둠도 아니다. 대신 “침묵은 산란된 빛이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빛, 즉 말의 빛 속으로 수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3) 이는 <침묵의 빛> 뮤직비디오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동트기 전의 바다에서 시작해,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찍은 그 뿌연 화면. 하지만 앨범은 거기서 끝난다. 우리는 말의 빛에 수렴되지 않은 채 침묵의 빛 속에 잠긴다.


3. 다시 <돌팔매>로

작자의 말에 멋대로 걸려 넘어졌다가 다시 그 말로 돌아올 뿐인 이러한 궤적은 사실 조금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이 또한 <침묵의 빛>에 관한 어떤 말에 의지해 양해를 구해본다면 지나친 것일까? [빌린 입]의 마지막에 대해 이민휘는 “상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창이 되지만, 상이 명확하게 보이면 우리는 그것에서 한 가지만을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어수선한 거쳐감(들)이 과연 이걸로 해결이 될지. 이렇게 다시 빌린 입으로 말한다. 그것은 슬픔이지만, 한편으로 원동력도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김나리


(1) 인디포스트(https://www.indiepost.co.kr/post/1108)와 어라운드 매거진(http://naver.me/xwCj7LWS)의 인터뷰를 참조했다. 인터뷰 인용은 인디포스트에서만 했다.

(2) 정구원, 「가사로부터 도망치기」, 『HETEROPHONY 2』, 2019, 2쪽.

(3) 막스 피카르트, 「말과 빛」, 『인간과 말』,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013, 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