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부르는 노래

얼마 전 버스를 타고 가다 무심결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FM을 듣게 되었다. 들었다기보다 스피커가 나의 귀를 잡아끌었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노랫가락에 찔끔했다. “일사 후퇴 때 피난 내려와/살다 정든 곳 두메나 산골/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나를 키워준 내 고향 충청도.” 조영남의 이 노래가 정답게 흘러 나왔다. 지겹게 들었을 노래이다. 물론 불러 본 적은 없다. 딱히 부를 이유도 없을 것이다. 내 고향은 충청도가 아니라 강원도이므로. 그런데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그 노래에 갑자기 뭉클한 기분이 들다니, 난처한 일이었다. 그 노래를 듣고 덩달아 기분이 들척지근해지는 것은 노래를 부른 이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곧 나의 것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피난을 겪은 일도 없고 돈을 벌기 위해 야반도주를 하며 집을 떠난 적도 없다. 그것은 나의 전 세대의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품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성장을 할 때 어른이었던 그들은 내가 듣고 보는 것들 속에 온통 고향이란 말을 흩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그 억척스럽고 곤핍한, 그러나 각자 같을 리 만무했을 다기한 삶의 궤적을 실향이란 서사로 수렴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모두의 마음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못 본 척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었다. 그 아픈 마음이 무엇인지 딱히 뚜렷이 헤아리지 못해도 그 마음은 결국 나의 마음처럼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다 노래방이란 곳엘 가면 강산에의 <라구요>를 자주 불렀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남은 인생 남았으면/얼마나 남았겠니 하시며/눈물로 지새우던 내 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꼭 한 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라구요.” 그러니까 고향은 어머니, 아버지의 장소이지만 나는 그 곳을 향한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나의 고향을 노래한다기보다는 다른 누군가의 고향, 나로서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일 지난 시대의 고향을, 지금은 아무도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는 여느 역사적인 시대를 살았던 경험을, 나는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 대학을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지만 명절이면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찾아가려 귀향 버스를 타고, 고향을 찾았답시고 고향 친구들을 만나 새벽까지 술판을 벌였던 것을 기억하자면, 내겐 고향이라는 감각이 흐릿하게 버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뜬 후 나는 고향을 찾은 일이 없고, 죄다 서울 어딘가에 사는 고향 친구들을 고향 친구랍시고 만날 일 역시 사라졌다. 고향을 떠났지만 그것은 나에게 무엇을 잃어린 애통한 일은 아니었다. 모두 으레 그러했듯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일자리가 있는 곳에 가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났을 뿐이다. 그것은 이주이지 실향은 아니다. 이주를 위해 떠나야 했던 곳은 그저 전에 살던 곳이지 딱히 고향이란 곳은 아니다. 가끔 공간이니 장소이니 하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눌 때, 행정구역상의 정읍은 공간이지만 내 고향 정읍은 장소일 거란 식의 말로 운을 떼곤 한다. 공간과 장소가 무엇이 다른지 분간하기 위해서이다. 비장소라는 개념이 유행하고 장소-특정적인 미술이 중시되며 ‘핫플’ 말고는 딱히 제가 사는 곳을 장소로서 경험하고 인지하는 일이 희박해진 세간의 사정을 생각하며, 출발점으로서 공간과 장소를 분간하는 게 출발점으로 딱일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충청도는 통치의 대상으로 공간을 추상적으로 작도하며 만들어진 행정구역의 이름이다. 그러나 피난 내려와 그곳에 살았던 이들에게 그곳은 장소이다. 그곳에서 살았던 이들은 그곳에서 살며 듣고 본 것들을, 그곳에서 겪은 일들을 자신의 삶의 기억 속에 오롯이 새겨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고향은 없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고향은 어쩌면 태어난 산부인과 이름 정도로 대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하릴없이 버스 창밖을 보다 듣게 된 <내 고향 충청도>에 움찔했다니, 이상한 일인 것이다.

- 이민휘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녀의 새 앨범 [미래의 고향]에 대한 글을 부탁한다고 했다. 가끔 제가 잘 모르는 것을 두고 뻔뻔스럽고 오지랖 넓게 비평을 하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난감했다. 느닷없는 일인지라 반쯤은 그러겠다는 반쯤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답을 하다, 설득에 못 이겨 어쨌든 해보기는 하겠다는 답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몇 번 앨범을 들었다. 글을 쓰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생각나면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고향이 소멸한 세계에서 고향을 노래하는 그녀의 엉뚱함에 대해 생각하며. 대개 기타와 베이스에 가끔은 멜로디에 기운을 북돋우듯 아니면 노래하는 이의 뿌연 음색을 어루만지듯 동반하는 타악기의 찰랑거리는 사운드에 정신을 빼앗기며. 물론 나는 왜 그녀가 이토록 회한에 가득한 마음으로 고향을 노래하는지 캐물을 자격이 없다. 아마 누구도 그런 자격이 없을 것이다. 고향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고향을 부르는 마음의 자리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앨범을 들으며 나는 이민휘의 짐작할 수 없는 고향을 향한 슬픔을 마음 속에 그려보려 했다. 물론 그것을 그려낼 턱이 없다.

- [미래의 고향]은 고향에 관해 말하며 미래라는 시제를 동원한다. 고향은 과거의 시제에 속하므로 이는 모순어법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온전한 말일 수도 있다. 미래엔 고향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는 물음을 던지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은 고향이란 말에 새로운 의미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고향이 장소라면 미래는 시간이다. 그런데 시간을 온전히 경험하며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장소를 온전히 경험하며 산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고향이란 말에서 퍼뜩 떠올리게 되는 생각도 그 것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장소를 그리워한다기보다는 과거라는 시간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장소와 시간이 서로 담을 쌓은 오늘의 상황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미래’의 ‘고향’은 어느 곳에 산다는 것이 어떤 때를 산다는 경험과 온전히 접착되어 있는 세계를 희구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미래의 고향]은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듯 보인다. 이를테면 미래라는 시제가 처한 옹색한 상황을 떠올려 보자. “미래의 희망”이라는 문구는 닳을 대로 닳은 상투어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그 말에는 지울 수 없는 집합적인 삶의 세계가 스며있었다. 희망으로 채워진 미래란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혹은 모두의 것임을 상정한다. 미래의 희망이란 말 속엔 역사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역사란 나나 너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진부하기 짝이 없게 들렸던 “미래의 희망”이란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역사적 감각이 살아 있다. 한 때 우리는 우리가 함께 하는 세계를 말하고자 시간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지금 미래란 고작 나의 취업이나 승진 전략 아니면 노후 생활에 대한 설계를 가리키는 시간처럼 여겨진다. 우리라는 이들로부터 떠난 시간은 서로 같을 게 전연 없는 너와 나의 각자 다른 저마다의 개인적 미래라는 시간 속에 침몰한다. 그렇기에 미래의 고향은 더욱 슬프게 들린다.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게 된 트랙인 <무대륙>에서 이민휘는 “난 그제야 우릴 아네/난 그제야 우릴 보네/우리는 갈 곳이 없고/끝내 안녕을 말하네/안녕”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우리를 찾고 그녀가 찾던 우리를 발견했어도 그런 뒤늦게 알아본 우리는 함께 세계를 만든 적이 없으므로 같이 있을 곳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나는 이민휘의 노래를 사랑을 잃고 헤어진 이들이 서로가 함께 할 곳을 다시 희구하는 연가(戀歌)로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환상통의 거울 치료>에서 그녀가 읊조리는 “다만/당신도 그곳을 찾는다면/다만/당신도 그곳을 찾는다면”을 연인이 함께 숨을 곳을 찾겠다는 의지로 읽고 싶진 앞다. 무엇보다 <귀향>에서의 “난 결국 여기 왔는데/내 얼굴은 여기 없네/한참 동안 우린 그저/서로의 말을 몰랐네/애처롭고 서운하게/언제인가 알았듯이”란 노래를 오해로 헤어진 자들의 후회로 듣고 싶진 더욱 않다. <무대륙>을 시작하는 서늘한 노랫말이 말하듯이 그것은 슬픔과 웃음의 관계, 실패와 전진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를 돌이켜 보는 일을 다룬다. “어느 밤에 만난 이가/너의 슬픔이 진짜냐 물으면/너의 웃음이 진짜냐 물으면/나는 그제야 다급히 우리를 찾지/나는 그제야 뒤돌아 우리를 부르지.” 그러니까 우리가 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분투는 오직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과 장소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노래한다.

- 스즈키 이즈미의 책을 읽다 이런 구절과 마주쳤다.

“불량소년에게 오랫동안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째서 불량해지는가 하는 의문에, 전에 불량소년이었던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뭐가 자신의 적인지 확실히 몰라서 그래.’ 사회구조가 마음에 안 드니까, 어쩐지 화가 나니까, 이 세계에 대한 적의를 어떤 식으로 발산시키면 되는지 모르니까.”(스즈키 이즈미, 여자와 여자의 세상, 최혜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372-3면) 뭐 대단할 건 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 대목을 읽으며 마침 글을 써야 하는 숙제의 주인공, 만수가 퍼뜩 떠올랐다.

무키무키만만수의 만수였던 이민휘. 사실 그때의 그녀를 불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렬한 불량함을 마주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때의 만수를 떠올리는 것을 지금의 이민휘가 달가워할지 잘 모를 일이다. 그래도 나는 그 때의 불량함을 잊을 수가 없다. 불량소년을 동경했다는 스즈키 이즈미의 생각은 적(敵)이라는 상대를 만들어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하기 위한 핑계거리였다. 모두가 적인 것 같아 어디에서부터 분통을 터뜨려야 할지 모를 때의 성난 기분을 터뜨리는 소동을 보는 것처럼 나는 무키무키만만수를 들었다. 이들의 노래가 좋다고 말했다가 “니 귀가 이상하다”는 빡치는 핀잔을 들으며. 그리고 나는 다시 만수 이민휘의 노래를 듣는다. 그녀의 불량함은 어쩌면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적에 대해 말하기보다 우리에 대하여 말하기로 결심하는 불량함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적이 무엇이든 그 적에 대해 싸울 우리를 위해, 너와 내가 함께 살 미래의 고향을 위해, 그녀는 <미래의 고향>에서 술회하듯이 “나홀로 걷는 길에도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서동진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