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밤마다 선명한 꿈을 꾼다. 가 본 적 없음에도 익숙한 지명과 상상 속의 안부들이 후두둑 쏟아져내려 자주 가슴팍이 축축해진 채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실재하지 않는 기억에 정차할 때마다 화들짝 피어나는 열꽃이 당황스럽다.
그 오랜 열병의 흔적은 타인의 생활을 손가락으로 무심히 넘겨볼 때면 떠오르는 어떤 장소의 환영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그것은 오래 전, 취향과 견해의 표지를 공들여 장식하며 친구들과 서로를 베고 누워서 잔을 부딪히던 나날을 닮아 있다. 그런데 환영 속 그 공간에 언젠가부터 낯선 사람들이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곳은 누군가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저 한 시절을 빌려 살았던 자리였던 것이다. 나만이 몸을 털고 일어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걸어왔음을 깨닫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걸어온 날보다 곱절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미래의 고향]을 들으며, 나는 풀려나지 못한 채 일렁이던 몇 개의 장면이 밀려와 나의 뺨에 닿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의 안팎에 우리가 우연히 놓여있었던 날들의 기억이다. 물론 그 중의 무엇도 고향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이민휘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정확히 향했고, 의미를 비밀에 부치면서도 먼 길의 길목들을 그림처럼 이어주었다.
‘고향’은 대개의 맥락에서 대상 자체보다 그것을 향한 마음의 작용과 오히려 더 밀접히 결부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닿을 수 있는 동시대의 고향이란 사라진 장소와 시간을 지시하는 명사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함께 목격한 실향의 경험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허물어지고 쫓겨나기를 거듭한 끝에 고향을 영영 잃은 까닭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고향에 대한 증언이자 마땅히 돌아갈 곳이 되었다. 당신과 나는 길 위에서 거울처럼 마주본다. 나의 얼굴을 잊어도 당신의 얼굴로부터 끝내 나를 알아챔으로써 “우리는 우릴 우리라고 부를 수”있는 것이다. 그 순간, 오래 전과 “같은 노래”가 들려온다.
귀를 기울인다. 기실 이민휘는 몇 번이고 노래를 통해 ‘우리’를 발명하고 있다. 노들노래공장 수업에서, 카페 마리에서 발신한 ‘국제호출주파수’위에서, 부산 영도의 85호 크레인 앞에서, 그는 정말 그랬다. 노래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나날 속에서 우리가 정말로 함께 머물 수 있는 찰나의 영토이자,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용기 내 첫 음을 마음에 띄우기만 하면, 노래는 언제든 그것이 나눠 진 모든 기쁨과 상실을 부둥켜안고 찾아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펼쳐놓는다.
한없이 지연되면서도 다가오는 무언가로 상상되었던 ‘미래의 고향’은, 들을수록 매일 실현되고 있는 환대의 약속으로 읽힌다. 만나기로 한 장소들이 사라지더라도 “오늘 부르는 노래”만은 남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자라나 마주칠 것이며, 먼 곳으로 달려가 더 많은 얼굴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나를 잊은 당신이 길 위에서 웃음이나 슬픔을 문득 물어 온다면, 나는 “같은 노래”를 증표처럼 소중히 흥얼거릴 것이다.
목소 (사운드 디자이너)